제목 | 19.12.24 -프란치스코 교황 성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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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
등록일 | 2020년 01월 10일 (10:29) | 조회수 | 조회수 : 1,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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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 성탄 구유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교황 교서 놀라운 표징 (Admirabile Signum) 1.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소중한 성탄 구유의 놀라운 표징은 끊임없이 경탄과 경이를 자아냅니다. 예수님 탄생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느님 아드님의 강생의 신비에 대한 소박하고도 기쁜 선포입니다. 실제로, 성탄 구유는 성경에서 울려 퍼지는 생생한 복음과도 같습니다. 성탄의 장면을 관상하면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만나시고자 사람이 되신 겸손하신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영적 여정으로 초대받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교서를 통하여, 주님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구유를 준비하는 우리 가정들의 아름다운 전통뿐만 아니라 일터, 학교, 병원, 교도소, 광장에 구유를 설치하는 풍습도 장려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갖가지 재료들을 활용하여 만든 작지만 아름다운 작품들마다 늘 상상력과 창의성이 돋보입니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풍요로운 대중 신심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기쁜 전통을 이어 나가는 법을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배워 왔습니다. 저는 이 풍습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점점 성탄 구유가 사라져 가고 있는 모든 곳에서도 사람들이 이러한 풍습을 되찾고 되살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2. 성탄 구유의 기원은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사건에 대한 복음의 상세한 설명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에 대하여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7). 예수님께서는 구유에 누워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 장소가 라틴어 프래세피움(praesepium)을 어원으로 하는 이탈리아어 프레세페(presepe), 곧 구유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이 세상에 들어오시며 가축들이 여물을 먹는 곳에 자리하셨습니다. 건초더미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요한 6,41)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 그분의 첫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른 교부들과 더불어 이 상징적 의미에 깊은 감동을 받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그분께서 우리의 양식이 되셨습니다”(「설교집」[Sermones], 189,4). 실제로, 구유는 예수님 생애의 다양한 신비들을 담고 있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 신비들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해 줍니다.
이제 우리에게 친숙한 성탄 구유의 발상지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우리는 레아티나 계곡에 자리한 작은 이탈리아 마을 그레치오(Greccio)를 머릿속에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이곳에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1223년 11월 29일 호노리오 3세 교황에게서 자신의 규칙서(Regola)를 추인받고 로마에서 집으로 되돌아가던 길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한 적이 있었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곳 그레치오의 동굴을 보고 베들레헴의 정경을 떠올렸습니다. 아마도, 아시시의 빈자 프란치스코 성인은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서 예수님 탄생 모자이크화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옛 전승에 따르면 이 대성전에는 구유의 일부가 모셔져 있고, 그 장소 가까이에 예수님 탄생 모자이크화가 비치되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전집」(Fonti Francescane)에는 그레치오에서 일어난 일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주님 성탄 15일 전에,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 고장에 사는 요한이라는 사람을 불러 자신의 바람을 이룰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자 합니다. 필요한 것 하나 갖추지 못한 그 갓난아기가 겪은 불편함을 최대한 생생하게 제 두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아기가 어떻게 구유에 누워 있었는지, 그리고 황소와 나귀 옆에서 그 갓난아기가 어떻게 건초더미 위에 누워 있었는지를 그대로 보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충실한 벗은 이 말을 듣고 곧바로 가서 성인의 뜻에 따라 지정된 자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12월 25일에 다양한 지역에서 많은 형제 수사들이 그레치오에 왔습니다. 그리고 그 고장의 농장 사람들도 이 거룩한 밤을 밝혀 줄 횃불과 꽃을 들고 왔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도 이곳에 당도하여 건초더미가 가득 담긴 여물통과 황소와 나귀를 보았습니다. 이 성탄 구유 앞에 모인 모든 사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새로운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제는 구유 앞에서 성찬례를 장엄하게 거행하여, 하느님 아드님의 강생과 성찬례의 유대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레치오에는 조각상이 전혀 없었습니다.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이 성탄 구유를 재연하고 체험했기 때문입니다.2) 이렇게 우리의 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레치오의 구유 동굴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본래의 사건과 그 신비에 동참하는 일들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간극도 없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 대한 전기를 처음 쓴 작가인 첼라노의 톰마소는 이 소박하고도 감동적인 장면에 놀라운 환시의 은총도 함께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실제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1223년 그 성탄 구유에 모였던 사람들은 “각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만한 기쁨을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3) 3.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처럼 소박한 표징으로 위대한 복음화 활동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의 심금을 울려, 오늘날까지도 우리 신앙의 아름다움을 소박하게 되살리는 진정한 모습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첫 구유를 재연해 놓은 바로 이 장소는 이러한 마음을 표현하고 북돋워 줍니다. 그레치오는 침묵으로 둘러싸인 산중 요새,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 왔습니다. 성탄 구유가 이처럼 커다란 놀라움과 감동을 자아내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애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와 같이 작아지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미 언제나 신비인 생명의 선물은, 마리아에게서 나신 그분께서 모든 생명의 샘이고 양분이심을 깨달을 때에 더욱더 놀라운 것이 됩니다. 성부께서는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우리를 찾아 주실 형제, 늘 우리 곁에 계시는 충실한 벗인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를 용서하시고 죄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집 안에 성탄 구유를 꾸미는 것은 우리가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그 역사를 되살리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복음서들은 언제나 마땅히 예수님 탄생 사건에 대한 이해와 성찰의 원천이 됩니다. 구유의 성탄 재현도 우리가 그 광경을 그려볼 수 있게 도와줍니다. 구유는 우리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우리가 매우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실제 일어나는 사건의 동시대인으로서 구원 역사에 동참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성탄 구유는 그 기원인 프란치스코 성인 때부터 특별한 방식으로, 성자께서 강생하심으로써 몸소 택하신 가난을 느끼고 만져 보도록 우리를 초대해 왔습니다. 이는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분께서 나아가신 겸손과 가난과 내어줌의 길을 따르라는 호소를 함축합니다. 가장 곤궁한 형제자매들에게 자비를 베풂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고 섬기라고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마태 25,31-46 참조). 4. 이제 저는 구유를 이루는 여러 요소들을 성찰해 보고 그 안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선, 그 배경은 밤의 침묵과 어둠 속에 별이 빛나는 하늘입니다. 이는 복음 이야기의 충실한 재현일 뿐만 아니라 상징적 의미도 지닙니다. 우리가 삶에서 수차례 경험해 본 어두운 밤들을 떠올려 봅시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들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저 버려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현존하시어, 우리 존재의 의미에 관한 다음과 같은 궁극적인 질문들에 응답하십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왜 이 시대에 태어났는가?’, ‘왜 사랑하는가?’, ‘왜 고통받는가?’, ‘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가?’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주시고자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오심으로써 어둠은 밝혀지고 고통의 그늘에 앉아 있는 수많은 이들은 길을 찾게 됩니다(루카 1,79 참조).
성탄 구유의 일부인 배경에 관해서도 언급할 만합니다. 어떤 때에는 고대 궁전과 가옥이 무너져 내린 폐허가, 어떤 때에는 베들레헴 동굴 또는 성가정의 집이 그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폐허의 재현은 13세기 도미니코회의 자코보 데 보라지네의 「황금 전설」(Legenda Aurea)에서 영감을 받은 듯합니다. 이 책은 동정녀가 아이를 낳는 일이 일어난다면 로마 평화의 신전이 무너져 내리리라는 이교도의 신조에 대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 폐허는 무엇보다도 타락한 인류, 필연적으로 무너져 썩고 사그라져 버릴 모든 것에 대한 가시적 표징입니다. 이러한 장면은 예수님께서 낡은 세상 한가운데 나타나신 새로움이라는 사실을, 그분께서는 이 세상과 우리 삶을 치유하고 재건하여 그 본연의 광채를 되찾게 하고자 오셨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5. 우리는 정성을 다해 산과 개울과 양과 목자로 구유를 꾸밉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여러 예언자들이 선포했듯이, 메시아의 오심을 경축하는 데에 모든 피조물이 동참한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됩니다. 천사와 길잡이 별은, 우리 또한 동굴을 찾아 주님을 경배하러 가는 여정에 부름받았음을 보여 주는 상징입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루카 2,15). 천사의 예고를 들은 목자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가르침이 이 단순한 말에서 나옵니다. 온갖 다양한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다른 많은 이들과는 달리 목자들은 가장 본질적인 것, 곧 구원의 선물에 대한 첫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비천하고 가난한 이들이야말로 강생 사건을 반길 줄 압니다.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를 만나러 오신 하느님에 대한 응답으로, 목자들은 그분을 만나 사랑과 감사와 경외를 바치러 길을 나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당신 자녀들을 만나셨습니다. 바로 이 만남으로 우리 신앙이 생겨나고, 성탄 구유를 통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그 탁월한 아름다움이 빚어집니다.
6. 우리는 흔히 성탄 구유에 많은 상징적 모형들도 덧붙이곤 합니다. 그러한 모형들로는 무엇보다도 걸인들 그리고 마음의 풍요로움만을 아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아기 예수님께 다가갈 온전한 권리를 지닙니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가난한 이들을 구유에 다가가지 못하게 하거나 구유에서 내쫓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온전히 구유에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참으로 이 신비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흔히 그들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탄 구유에 있는 가난하고 순박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이 가장 필요한 이들 그리고 가까이 와 주십사 청하는 이들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마태 11,29)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본질을 깨닫고 실천하게 가르치시고자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소박하게 사셨습니다. 부의 환영에 사로잡히거나 행복에 대한 헛된 약속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성탄 구유는 분명히 드러냅니다. 구유의 배경으로 기쁨의 선포에 귀 막고 마음 닫은 헤로데 임금의 궁전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유에서 탄생하심으로써, 상속받지 못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게 희망과 존엄을 줄 수 있는 유일하고 참다운 혁명을 몸소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혁명, 자비의 혁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유에서 온유하지만 힘차게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의 필요성을 선포하십니다. 이는 아무도 소외되거나 배척받지 않는 더욱 인간적이고 형제애 넘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흔히 어린이들은 - 한편으로는 어른들도! - 복음 이야기와 전혀 무관해 보이는 다른 모형들을 즐겨 구유에 올려놓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추가하는 모형들은,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이 새로운 세상에 모든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목자에서 대장장이, 제빵사에서 음악가, 물동이를 이는 여인에서 뛰노는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모형은, 당신의 신적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일상의 성덕, 곧 일상의 평범한 일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해 나가는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7. 점점 동굴로 다가가다 보면,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 상을 발견합니다. 마리아께서는 아기를 바라보면서, 찾아온 모든 이에게 그 아기를 보여 주는 어머니이십니다. 마리아 상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티 없이 깨끗한 마음을 두드리셨을 때에 이 젊은 여인을 에워싼 그 위대한 신비를 묵상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리라 예고하는 천사의 메시지에 온전히 순종하며 응답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마리아의 응답은 하느님의 뜻을 신뢰하며 자신을 내어 맡기는 법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 줍니다. 마리아는 “이루어지소서”(fiat)라는 응답으로, 동정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 아드님 덕분에 이를 거룩하게 하여 하느님 아드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 안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를 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당신 아드님을 혼자만 간직하지 않으시고 그분 말씀에 순종하여 이를 실천하도록 모든 이를 초대하십니다(요한 2,5 참조). 마리아 곁에는 아기와 그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는 요셉 성인이 서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대개 손에 지팡이나 등불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요셉 성인은 예수님과 마리아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자신의 가정을 지키는 수호자입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헤로데의 위협에 대하여 경고하셨을 때에, 그는 지체 없이 이집트로 피신하였습니다(마태 2,13-15 참조). 그리고 위험이 지나가자,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나자렛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자렛에서 요셉은 소년 예수님 그리고 청년 예수님의 첫 스승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과 자신의 아내인 마리아를 둘러싼 위대한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의로운 사람인 그는 언제나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의탁하였으며 이를 실천하였습니다.
8. 주님 성탄 대축일에 우리가 아기 예수님 상을 구유 안에 모실 때에, 불현듯이 성탄의 장면이 생생히 되살아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어 우리 품에 안기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변화시켜 주시는 당신 권능을 연약함과 나약함 이면에 숨기십니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어린아이가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이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려 웃으시며 당신의 위대한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한 아이의 탄생은 우리 앞에 생명의 위대한 신비를 보여 줌으로써 기쁨과 경탄을 자아냅니다. 갓난아기를 바라보는 젊은 부부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들 삶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1요한 1,2). 이러한 말로, 요한 사도는 강생의 신비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구유를 통하여 우리는 유일무이하고 전무후무한 이 사건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역사의 행로를 바꿨으며, 그때부터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과 이후를 기준으로 연도를 표기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방식은 놀랍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저버리시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신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행동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여느 어린아이처럼 자고 모유를 먹고 울고 놀았습니다!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끊임없이 하시는 가늠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성탄 구유는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또한 이 구유는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 삶에 동참하게 되었는지 묵상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에서 궁극적인 의미를 얻고자 한다면 그분의 제자가 되라는 초대를 받습니다. 9. 주님 공현 대축일이 가까워지면, 우리는 성탄 구유에 세 명의 동방 박사 조각상을 놓습니다. 이 박사들은 동방에서 별을 보고 베들레헴에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립니다. 이 값비싼 예물은 우의적 의미를 지닙니다. 황금은 예수님의 왕직을, 유향은 그분의 신성을, 몰약은 돌아가시어 무덤에 묻히시게 된 그분의 거룩한 인성을 의미합니다.
구유의 이 장면을 바라보며, 우리는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되새기게 됩니다. 우리 각자는 모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자비 활동을 실천하여, 예수님을 만난 그 기쁨과 그분의 사랑을 증언하라고 부름받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매우 기나긴 여정을 거쳐 그리스도께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부유한 현자인 그들은 저 멀리서 영원한 것을 갈망하며 길고 험난한 길을 떠나 베들레헴에 도착합니다(마태 2,1-12 참조). 그들은 아기 임금님 앞에서 더없이 기뻐합니다. 초라한 주위 환경을 개의치 않고 즉시 땅에 엎드려 그분께 경배를 드립니다. 그분 앞에 엎드린 동방 박사들은, 통치자의 지혜로 별들의 행로를 인도하신 하느님께서 역사의 행로도 인도하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권세 있는 자들을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십니다. 집으로 돌아온 동방 박사들은 분명 메시아와의 이 놀라운 만남을 다른 이들에게 전했으며 그리하여 민족들 사이에 복음 전파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10. 성탄 구유 앞에서 우리는 구유가 완성되기를 애타게 고대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이러한 기억은 우리에게 신앙을 전해 준 이들에게서 받은 이 소중한 선물을 더욱더 깊이 인식하게 해 줍니다. 또한 그 기억은 우리 자녀와 손주들에게 이와 같은 기쁜 경험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상기시켜 줍니다. 구유를 어떻게 꾸미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똑같을 수도, 해마다 변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우리 삶에 건네는 말입니다. 성탄 구유는 어디에 어떠한 형태로 있든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려고 어린아이가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탄 구유는 신앙을 물려주는 소중하지만 힘든 과정의 일부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삶의 모든 단계에서, 우리는 성탄 구유를 통하여 예수님을 관상하고,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도 하느님과 그분의 자녀인 모든 형제자매와 함께 있음을 느끼고 믿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자 동정 마리아의 아드님이신 그 아기 덕분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우리의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우리도 이러한 단순한 은총에 마음을 열어 경외심에서 우러나온 겸손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고 결코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립시다. 그레치오 구유 성지에서 교황 재위 제7년 2019년 12월 1일 프란치스코
글,사진 - 엄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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